01
태어나기는 했지만...
염진현
2021.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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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태어났습니다
나는 태어나서 있습니다
과거의 나는 있었고
미래의 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있는 것만 있습니다
시간은 방향성이 없습니다
시간은 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은 걷고 있습니다
미래를 향해
혹은 과거를 향해
나는 당신과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습니다
당신의 등 뒤를 따라 걷고 있습니다
모래 위를 걷고 있습니다
모래 위에 당신의 발자국이 보입니다
이 발자국은 당신의 과거입니까 미래입니까
나는 지금 당신과 함께 있습니까
당신은 계속 모래 위를 걷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모래 위를 걸었고
내일도 모레도 모래 위를 걸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모래 위를 걷는 당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볼 수 없는 늙은 개가 생각납니다
늙은 개의 발자국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늘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늙은 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발자국이 선명합니다
늙은 개의 뼈와 가죽이 소멸하면
발자국은 없어집니까
발자국이 영혼이라면
늙은 개는 다시 달려옵니까
늙은 개의 뼈와 가죽을
발자국을 볼 수 있다면
늙은 개는 다시 달려옵니까
시간은 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편지가 있고
대나무가 태어나서 편지가 있고
발자국이 태어나서 편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편지를 위해 태어난 겁니까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노래를 부르던 친구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친구들은 죽었습니까
모든 몸이 달려오는 것 같습니다

02
삿포로
염진현
202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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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가 도착했다. 그는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편지였다. 편지글은 별다른 목적 없이 순수했고 컴퓨터로 조판된 것처럼 말끔했다. 편안한 냄새가 났다. 그는 하염없이 읽고 있다. 편지의 맨 상단이나 맨 하단에 이름은 없다. 그가 있었다. 편지 안에서 생로병사를 겪고 죽는 것 같았다. 편지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것 같았다. 그의 발은 편지에 잠겨있다. 겨울은 길고 길지만 눈이 있어 견디는 이곳. 이곳은 과거의 기억처럼 시차가 있다. 그는 아직 걸음마도 시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곳은 굴러다니면 그만. 그는 글자들과 함께 데굴데굴 아이처럼 간다. 집이라고 착각한 곳을 벗어나 진짜 집으로 가는 길. 그는 마음이 편안해서 좋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다. 겨울은 길고 길지만 눈이 있어 견디는 이곳. 이곳은 삶처럼 새하얀 마침표가 있다. 데굴데굴. 그는 새치도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그가 지나간다.
03
눈을 뜨니 꿈을 잃고
염진현
202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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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꿈을 잃고 빗장뼈에는 눈물이 고여 썩어있었다. 오야는 불결한 악몽의 까닭이 더러운 집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집까지 상하기 전에 깨끗이 해야겠어. 우선 머리카락을 치우기로 한다. 오야는 머리카락이 머리에 있을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머리카락은 몸을 감추었지만 침침한 입으로 여지없이 빨려 들어갔다. 오야는 입속에 엉켜있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헝겊으로 이곳저곳 닦는다. 먼지에도 색깔이 있네. 그리고 윤기 없는 수건들을 걷는다. 수건을 걷어서 가로로 접었다가 펼치고 다시 세로로 접는다. 오야는 세로로 접은 수건을 세 번 접을지 네 번 접을지 고민하다가 다시 빨기로 한다. 빨랫감들을 깊은 웅덩이에 던지는데 한 옷에서 향취가 진동한다. 세제로도 냄새는 지워지지 않고 오야의 손만 시리다. 숨으로 지워볼까? 오야는 실수로 기억까지 들이마셔 버렸다. 개의치 않고 설거지를 하기로 한다. 그릇에 붙은 때는 물방울 따라 미끄러지고 오야도 강파르게 미끄러지며 가슴에 얹혀있던 얼굴을 구토해 낸다. 얼굴이 말한다. 상처투성이군요?
너와는 상관없어. 흠이 생긴 흔적을 지우고 싶었던 것뿐이야. 갈 수 없는 곳에 가서 끈질기게 살아남았을 뿐이야. 여기서 나갈 수 없을 뿐이야. 오야는 얼굴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합니다. 말을 했을 뿐입니다.
04
구의외로움
염진현
2021.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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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한빈집에누워눈을감습니다
파란목도리를두른수증기가피어납니다
코끝으로찬기운이느껴집니다
진눈깨비가내리는까만밤입니다
나는눈을감은채들릴듯말듯중얼거립니다
보고싶은것을보기위해태어났다고
볼수없는것을보고싶어죽어간다고
내가가진것은그림자입니다
죽어가는눈입니다
심연을뚫어지게바라보다구멍을내고구멍난눈입니다
구멍난눈에는돌멩이가생기고돌은침묵합니다
얼굴을돌밑에묻어둡니다
멀어져갑니다눈이멀어져갑니다
초점이흐려지고달빛이흐려집니다
달은오늘도먼곳에있습니다
함박눈이내리는시린밤입니다
당신은돌아오지않으려나봅니다
새하얀어둠에서소리가울립니다
거기누구있어요?
나밖에없어요
누가떠났나요?
눈을기다리고있어요아이처럼깨끗한눈이요
병든눈을뽑고새눈을뜨고싶어요
지금은7월입니다당분간눈은오지않아요
나는눈을뜰수없어서영영잠이들었습니다

05
새로운 질서
염진현
2022.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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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아파트 신축 공사가 끝납니다
어느 때고 나는 허기진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는 새로운 친구가 있을까요
서둘러 짐을 꾸려 트럭에 싣고
이사를 갈 거예요

하얀 벽지와 하얀 집기들이 있는 곳으로
하얗게 말라가는 화면 속으로

새로운 침대는 미리 주문했습니다
고무나무 다리가 마음에 들어요
작은 책상과 의자 두 개
푹신한 소파까지도 모두 금요일에 온답니다

책꽂이에 들어가지 못하는
먼지 쌓인 책들과
옷걸이가 부족한 옷들은
모두 버려야 할까요?
침대 밑에 쌓아두는 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이삿날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상자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담긴 상자를 두고 온 것 같다고

06
모르 마음
염진현
2021.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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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는 같은 집에서 살아남아 뜨이지 않는 눈으로 고고의 소리를 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 눈물 흘렸나요? 안락했던 어둠을 깨우는 빛이 얄미웠을까요 네둘레가 훤히 보이는 무대가 불안했을까요 저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지배해야 될까요 무엇을 지배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훔쳐야 될까요 도둑이 되긴 싫은데 무엇을 훔칠 수 있을까요 도둑이라도 되고 싶은데 실마리 없는 지루한 놀이에도 미련한 그림자를 옆에 두고 기대하셨나요? 아니면 그 작은 형체로 고통을 견디셨나요?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날은 사과의 의미로 온기를 선물 받고 마음껏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떨어뜨린 창피를 다시 주워담고 아주 멋진 춤을 추었습니다 저는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주머니에 숨기신 틀림을 응원합니다 당신의 주머니에 숨겨진 떨림을 사랑합니다 혹여 잃어버릴까 겁이 나서 깊숙이 넣어주고 싶지만 언제든 눈을 감고 찾으면 될 테니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